해적판을 타고 / 윤고은


해적판을 타고10점
윤고은 지음/문학과지성사

잔꽃초등학교 5학년 채유나의 가족은 마당에서 채소를 기르고, 채송화를 심고 가꾸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센터’라고 불리는 아빠의 회사에서 사람들이 비닐자루들을 싣고 와, 이들의 집 마당에 자루들을 파묻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우리 집 마당에 묻는 것인지 수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불길한 징조와 불안한 예감만을 남긴 채 폐기물들과의 동거가 시작된다.

어차피 인간의 나이란 한 자리, 두 자리, 그리고 드물지만 세 자리 숫자, 그 세 종류 중 하나일 테고, 벌써 내 나이는 두 자리로 진입한 지 오래였다.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란 게 기껏 다른 사람 집에 잿빛 자루를 묻거나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전조 증상만으로 충분히 얼룩져 본편은 시작할 지면도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p. 97)



 

유나의 엄마는 잡지 촬영 등을 준비하며 마당에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행동하려 하지만, 오히려 동네에는 집 마당에 대한 불길한 소문만이 무성해질 뿐이다. 마당 아래 자루를 가져가겠다던 아빠의 회사에서는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말로만 약속을 반복한다. 미성년인 유나에게 아직 시작되지 않은 본편, 즉 어른들의 삶은 남의 집에 수상한 폐기물이나 묻는 것, 불안한 와중에도 자신의 마당을 빌려주는 것 정도의, 기껏 그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 집 마당에서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책임지는 어른은 없는 세계, 말만 무성할 뿐 행동이라고는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이제 막 두 자리 수의 나이에 들어선 유나의 삶까지 물들인다.
가까운 곳에 유해 폐기물이 묻혀 있다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과연 환상일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우며 현실 사회의 단면을 폭로해왔던 윤고은의 전작들을 떠올려봤을 때 우리 가족의 일을 모른 척하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은 상상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사건들만 간단히 꼽아봐도 이러한 상황은 이미 소설적 상상이 아닌 현실이다. 재난에 가까운 현실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해적판을 타고』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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